가버나움
영화는 참으로 지루했지만, 할 말은 정말 많았습니다. 할 말이 많지만 다 하려니 마치 소설 한 권을 써야 할 만큼의 분량이 나올 것 같고, 그렇다고 할 말을 하지 말자니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았습니다. 다시 또 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최소한 가버나움이 가지고 있는 배경, 그에 얽혀 있는 지리와 역사, 성경과 예수님 이야기, 그리고 인류학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 언급하자니, 주제별로 생각이 너무 장황해서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냥 조금씩 조금씩 빵조각을 뜯어 먹듯이 제 생각을 올려야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신다면 흥미를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상처받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 영화의 제목이 왜 가버나움인지부터 알아야 했습니다. 왜냐고요? 궁금하잖아요! 가버나움이라는 지명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빠질 수 없는 도시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궁금했습니다. 성경과 어떤 식으로 연관이 있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정말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향해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성경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음란함으로 유명했던 소돔을 차라리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쨌든 그런 가버나움이지만, 가버나움이라는 도시는 현재 이스라엘의 땅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있는 게토 지역입니다. 그곳에는 원래 살고 있던 토착 빈민들과 IS의 난동으로 인해 피난 온 다수의 시리아 난민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레바논과 시리아는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시리아 난민들이 많이 건너왔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영화의 제목인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저주를 퍼부으셨던 실제의 가버나움처럼 지옥과 같은 장소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 지역에서 말이죠. 그래서 제목을 그렇게 정했다고 합니다.
1970년대 초반, 칠레에서는 아옌데라는 의사 출신의 정치가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노선 자체가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었고, 당시 남미에서는 이미 쿠바가 공산화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자유주의의 대표 국가인 미국은 칠레가 사회주의를 표방하다가 공산화될 경우, 마치 도미노처럼 다른 남미 국가들도 그렇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남미 국가들의 빈부격차는 극심했으며, 미국 역시 소련과 중국과 함께 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결이 심화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막후에서 공작을 진행했습니다. 칠레 군부의 수장이었던 피노체트를 조종하며 그를 지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를 축출하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 약 16년간 독재를 이어갔습니다.
피노체트와 아옌데의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당시 칠레에서 아옌데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높은 영아 사망률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죠. 아옌데는 분유와 관련된 유제품을 국가에서 무상으로 공급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고, 결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다국적 기업이었던 네슬레가 분유 무상 공급을 돕기로 약속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미국은 네슬레를 회유하거나 협박하여 결국 그 약속을 철회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아옌데는 순식간에 닭 쫓던 개가 지붕만 바라보는 처지가 되었고, 앞서 이야기한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에게 권력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식량의 잉여를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오로지 이윤을 추구하는 네슬레와 같은 다국적 기업들이 미국과 같은 국가들과 결탁해 온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먹을 것이 넘쳐났지만, 정치적·사회적·이념적 이유로 희생된 굶주린 세계의 절반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거리를 전전하며 유리걸식하는 자인과 요나스가 등장합니다. 어떻게든 어린 요나스를 먹이려는 자인의 모습은 대견하면서도 눈물겹습니다. 또한, 자인이 집을 나오기 전, 허구한 날 손가락만 빨고 있던 빈민가 가족들의 모습도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위의 글들은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제 머릿속에 떠오른 단상들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우리의 원숭이 조상들이(진화론에 따르면) 인지 혁명을 겪지 않았다면, 다른 종들처럼(호모 탈렌시스, 호모 네안데르탈인 등) 빙하기를 거치며 멸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 진화론이 맞느냐, 창조론이 맞느냐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호모 어쩌고저쩌고’ 하는 화석들이 땅속에서 발견되었다는 전제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지금까지 유일한 종으로 살아남아 인류를 구성하게 된 것은, 앞서 말한 인지 혁명—즉, ‘머리가 깨이게 되는’—과정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종 구성원 간의 교류가 필수적인 군집 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나만 아니면 돼’ 혹은 ‘내가 우선이야’라는 이기적인 인지 능력이 다른 종보다 월등하게 뛰어났으며, 이는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였을 것입니다.
‘던바의 법칙’이라는 개념을 들어보셨을까요? 한 사람이 아무리 인간관계가 넓어도 진정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한계는 150명 정도라고 합니다. SNS에서 수천 명의 팔로워를 가진 파워 유저라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150명 정도라는 것이죠.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150명이나?’라고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영장류를 포함한 모든 포유류 중에서 인간만이 150명이라는 규모의 집단을 형성하고 단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목적 아래 뭉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단체 행동이 가능해지고, 이야기를 창조할 수 있으며, 상상을 하고 그것을 공유할 수도 있습니다. 꿈을 함께 꾸고, 공포를 함께 나누며, 두려움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증명되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미신과 종교라는 개념을 만들어 갔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그런 호모 사피엔스들이 ‘역사’라는 것을 인지하고, 기록하며, 간직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그렇습니다. 사피엔스들이 문자를 발명한 이후부터입니다. 수메르의 상형문자, 페니키아의 화폐, 은나라의 갑골문 등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명의 발달은 기원전 4000년경의 일입니다. 여기서 ‘고작’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사피엔스들이 하나의 종으로 살아남은 시기가 기원전 8만~10만 년 전으로 추정되니까요.
그렇게 현생 인류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2019년 현재까지도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인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간직하고 싶어 하지만, 결국 몇 다리만 건너면 아무도 모르는 자신들만의 의미일 뿐입니다. 너무 허무한 이야기일까요? 혹은 너무 냉소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지 지극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을 뿐입니다.
가끔 저는 제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상상을 합니다. 마치 산 정상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드는 생각처럼 말입니다. 저 산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고, 저 역시 곧 다시 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겠지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나온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무척이나 지루하다는 이야기도 드렸을 것 같네요. 감독의 의도는 아마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억지로 감정을 자극하지는 않지만, 느리게 흘러가는 장면과 장면들을 한 번 느껴 보시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감독의 의도가 정말 그랬다면, 적어도 저에게는 성공한 셈입니다. 자인이 엉겁결에 떠맡은 요나스를 데리고 힘들어하는 순간부터는 저도 자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금 제 처지가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ㅎㅎ)
지금까지 길고 긴 글을 읽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카카오톡 메시지라 그렇게 길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사실 긴 글도 아니라는 것 아시죠? 괜히 장황하기만 해서 지루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뒤늦게 걱정이 되네요. 이제 결론을 내야겠죠. 어떻게 맺을까 고민하다가, 제가 간직하고 있던 너무나 좋은 글이 있어서 그 글을 소개하며 결론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쓸데없이 길기만 하고 유치한 제 글보다 훨씬 더 좋은,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글이니까요.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작년에 작고하신 황현산 선생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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