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제 덕 좀 보셔요
김동호 지음.
잔잔하면서도 철저히, 하나님 중심 신앙으로 옹골진 지사형 목회자. 평소 인생과 목회와 설교의 방향을 ‘하나님의 젓가락이 자주 가는 메뉴’에 ‘즐겨찾기’해온, 참으로 예수 중심인 신본주의 설교자. 부모가 가진 것이 있을지라도 나이 들어 자식 덕 보기를 기뻐하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 집에 양식 삼고 싶어 하신다는 말씀(말 3:10)에서 충격적 은혜를 받았다. 그 은혜에 보답하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흐믓해 하실 일’을 메시지에 담아 천국잔치 메뉴를 마련해왔으며, 크리스천 각자가 하나님을 위한 잔칫상 메뉴 중 하나가 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덕 보시는 영적 효도에 동참할 것을 강권한다. 장로회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 기도교교육학과에서 공부하고, 미국 맥코믹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학원복음화협의회의 공동대표와 코스타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깨끗한 고백’, ‘교사 바이블’, ‘깨끗한 크리스천’, ‘깨끗한 부자’, ‘자식의 은혜를 아는 부모’, ‘크리스천 베이직’, ‘생사를 건 교회개혁’등이 있으며 2003년 코스타 코리아의 메시지를 담은 ‘나는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는다’를 공동 저술했다. 승동교회 담임목사, 영락교회 교육담당 목사, 동안교회 담임목사를 거쳤고, 지금은 높은뜻숭의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을 만큼 사랑하는 일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 입니다.
윤동주의 ‘십자가’ 중에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21-28절을 통하여, 개인의 욕심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에 기쁨이 없는 이유를 아주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별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일’은 욕심에 속한 것이고, ‘하나님의 일’은 소명에 속한 것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 출세하려고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부자가 되어 밥 잘 먹고 편히 살려고 태어난 존재도 아닙니다. 사람은 그와 같이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 일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 소명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사단은 우리의 관심과 목적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두지 아니하고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일에만 두게 합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우리 대부분은 그와 같은 사단의 시험에 빠져 소명을 잃어버리고 개인의 야망과 욕심만을 위하여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그와 같은 개인적인 야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만 보면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면서도 아까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전능한 분이시다. 그 창조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함으로써 나를 구원한 분이시다. 나는 비록 부족하고 흠이 많은 죄인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은 절망이지만 내 삶의 결국은 소망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내가 구원 받은 사람임을 믿는다. 지금 이와 같은 문제로 내가 죽고 망할 사람이라면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지도 않으셨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Work for God)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일하는 것'(Work in God)이 아닐까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일에 몰두하여 하나님 안에서 일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저 열심히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을 위하여 시작한 일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이에 자기 자신을 위한 일로 변질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상실하여 지치게 되고, 결국에는 실패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Work for God’만 생각하지 말고 늘 ‘Work in God’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힘과 능력, 그리고 지혜로 일을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일이 기도를 앞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는 행동입니다.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만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사단 때문에 세상에 죄가 들어왔는데, 죄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랑을 앗아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는 이기적인 욕심인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소중한 사랑을 앗아가버렸습니다. 사람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안겨줍니다. 따라서 사랑의 은사를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과 사람을 사랑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 구하며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삶은 언제나 구체적이어야만 합니다. 특히 사랑과 신앙은 무엇보다도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피조물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내게 유익이 될 만한 사람만 사랑하는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밖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랑해도 아무 유익이 없는 가난한 사람과 고아와 과부를 돌봐주고 사랑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빼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그 구차한 중에도 돌봐주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말씀하시며, 마태복음 10장 42절에서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장 중에 눈에 띄는 단어가 둘 있는데 그것은 ‘진실로’라는 말과 ‘결단코’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단정적이고 극단적인 단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따뜻한 마음을 귀히 여기시며 그 마음을 기뻐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풀고,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한다고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구제’입니다. 저는 성경말씀 중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구제를 ‘봉사’로 하는것이 아니라 ‘전문’으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아마추어보다 프로가 좋습니다. 백명의 아마추어 선수보다 한 명의 프로 선수가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쉽게 이야기하지만 세상에 사랑처럼 힘들고 어려운 것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 힘들고 어려운 이유가 많이 있겠지만 저는 그 이유 중 하나를 ‘공의와의 조화’라고 생각합니다…공의를 생각하다보면 사랑을 놓치고, 사랑을 생각하다보면 공의를 놓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의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사랑없는 공의는 공의가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무조건 덮어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함부로 들추어내지도 않았습니다. 공의없는 사랑은 문제를 무조건 덮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을 잡습니다. 사랑없는 공의는 무조건 문제를 덮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잡습니다. 사랑없는 공의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은 옳은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들이 말을 함부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별로 민감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은 옳고, 자신의 비판을 받는 사람은 옳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 정도는 들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과 교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의를 잃어버린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와같은 사랑은 결국 사랑 받는 대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입니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공의없는 사랑으로 망가지듯이, 사랑없는 공의로 죽어갑니다. 공의와 사랑이 함께 잘 균형을 이루고 입을 맞출 때에만 사람과 교회는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그 동안 가장 많이 사용하고 애용하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에 있다는 바울의 신학을 강조하다 그것이 지나쳐 ‘은혜주의’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신학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바울의 신학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신의 예리함과 우월함을 입증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자랑을 삼으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본능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의’로 상대방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하다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자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에게 결단코 상을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소자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아무리 작게 여기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를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부덕과 무례는 사람을 하찮게 보는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명심할 뿐 아니라 우리 자녀들에게 꼭 가르쳐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과 세상을 귀히 여기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화평은 거짓된 화평입니다. 옳지 못한 일을 무조건 덮은 채 그것을 화평이라고 말하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진정한 의미의 화평이 아니며, 진정한 화평을 위하여 때로는 검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으면 진정한 화평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제와 장학은 비행기의 양쪽 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지도자와 인재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도자와 인재에게만 관심을 쏟는 것도 건강하지 못한 반면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에게만 관심을 쏟는 것도 전체적으로 보아 건강하지 못합니다. 구제기관과 장학재단은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 하나에만 충실하면 되겠지만 교회는 양쪽을 균형 있게 섬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23절 말씀은 바울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것처럼 하여서 어떻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주께 돌아오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바울이 얼마나 선교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흩어지지 말고 모여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오히려 모여 있는 것보다 흩어지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에 모여 있게 하셨고, 막상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는 핍박을 통하여 오히려 그들을 흩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흩음을 통하여 복음의 확산이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어떻게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트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 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주소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
김동호 목사님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대개 호불호가 분명한 점이 흥미롭습니다. 언제나 목사님의 말씀은 어렵지 않지만, 진리의 원칙에 충실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대한민국 개신교 역사 100여 년 동안 신앙이 느슨해지고 타성에 젖어 비뚤어진 보수의 탈을 쓰고 비판받고 있는 한국 개신교를 향해 강한 개혁의 목소리를 내시며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실 때마다, 김동호 목사님에 대한 신뢰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됩니다.
It is interesting that people's opinions about Pastor Kim Dong-ho tend to be quite polarized. His sermons are always easy to understand, yet he remains steadfast in upholding the principles of truth. Throughout the 100-year history of Protestantism in South Korea, as faith has become lax and stagnant, disguising itself as a distorted form of conservatism and facing criticism, Pastor Kim has consistently raised a strong voice for reform and demonstrated it through his actions. Every time he does so, my trust in him deepens even fur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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