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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July, 2019

Tuesday, July 30, 2019 (Does religion save humanity?)

종교가 인간을 구원한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사실 구원 이라는 단어 자체가 필요 없을지도 몰라. 결국 문제의 근원은 '나' 야. 모든 문제는 내가 만들어낸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굳이 '구원' 이라는 말로 치환할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어. 종교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도움을 줄 수 있어. 하지만 결국,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홀로 서야 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생물들과 가시적으로 구별되는 지점이 있어. 나의 생각과 행동은 본능적인 무의식의 흐름과 학습된 의식의 순서에 따라 끊임없이 '또 다른 나' 와 소통하고 있어. 내가 첫 호흡을 내뱉은 순간부터 나는 사회라는 집합체의 일원이 되었고, 끊임없이 학습해 왔어. 어쩌면 나는 이미 스스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다만, 행동하지 못했을 뿐이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는 과정에는 사회적 약속이 따라왔어. 도덕과 규범, 이성과 체면 같은 것들이지. 이런 것들은 인간의 본능과 때때로 충돌하며 거추장스러운 굴레가 되기도 했어.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를 무시하고 행동할 수는 없었지. 이건 단순한 용기의 문제가 아니야. 그래서, 본능과 충돌하는 '또 다른 나' 는 언제나 고민하고 분주했던 거야. Does religion save humanity? No, it doesn’t. In fact, the word salvation itself might not even be necessary. Ultimately, the root of all problems is me . Every problem is something I have created, and the only person who can solve it is me. There is no need to replace the process of solving a...

Thursday, July 11, 2019 (The Thousand-Year Question)

어제 조정래 선생님의 신작 ' 천년의 질문' 세 권을 모두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장편소설을 집필하시기 전과 후에 간간이 수필집도 내셨지만, 제겐 본의 아니게 소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신 선생님의 소설이 출간될 때마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보다 우선하여 먼저 읽어왔습니다. 전설적인 장편소설 ' 태백산맥' , ' 아리랑' , ' 한강' 이후 선생님의 소설은 주로 두세 권 분량으로 집필되며 예전보다 그 양이 줄어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깊이와 완성도는 이전의 대작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출간된 ' 정글만리'  에서는 급부상하는 중국 경제와 시장에 대해, ' 풀꽃도 꽃이다'  에서는 무너져가는 한국 교육 현실에 대해 소설 형식을 빌려 이야기하셨습니다. 이번 작품 ' 천년의 질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한국 정치, 경제, 언론계의 현실과 그 문제들에 대응하는 시민단체의 역할에 대해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떤 비평가는 선생님의 최근 작품에 대해 "독자가 소설을 읽는 핵심 이유는 경제적 분석이나 정보 습득이 아니다... 미적 통찰이 부족하다." 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그래서? 소설이 반드시 미적 통찰을 담아야 하는 장르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문학상 받을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피식— 앞서 말씀드렸듯이, 선생님께서는 소설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계십니다.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은 소설이든, 수필이든, 논설이든, 칼럼이든 전적으로 작가의 몫입니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독자에게 남겨진 몫이지요. 어느 시대에나 글을 쓰는 사람들은 존재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 아부하는 글을 쓰든, ...

Saturday, July 06, 2019 (Is the concept of "common sense" really this ambiguous?)

'상식' 이라는 개념이 이렇게도 모호한 것일까요?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사물들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를 대하는 태도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 과격한 방식으로 드러날 때, 종종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인간의 다양성' 이라는 표현마저 부정적인 의미로 변질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힘겹게 느껴질 때, 대개 두 가지 방식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듯합니다. 하나는 자포자기 , 다른 하나는 폭력으로 포장된 이기주의 . 자포자기는 연민을 불러일으켜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분노' 가 내재된 폭력적 이기주의보다는 차라리 나은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현대 사회에서 심화되는 양극화로 인해,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태도, 그리고 소수자들에 대한 폭력이 점점 더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근대화 이후 강조되어 온 '인간의 다양성' 이라는 가치에 정면으로 반하는 이러한 현상들은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입니다. 신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은 레이건과 대처의 신자유주의 기조를 거쳐 더욱 조직화되고 거대해졌습니다. 혁명과 같은 거대한 변화가 없다면, 이 양극화는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 틈에서 간신히 버티며 살아갈 뿐이죠. 그러니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기회가 온다면 결코 놓치지 마세요.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표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평등을 인지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매스미디어가 발달하기 전에는 부유층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저 사람 부자래, 집에 엘리베이터가 있대." 같은 소문만이 존재했죠.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우리는 깨어나는 순간부터 ...

친절한 금자씨 (2005)

친절한 금자씨(2005) 감독: 박찬욱 예전에 이 영화에 대한 평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용도 가물가물해서 다시 한번 봤죠. 물론 사람들의 평가가 언제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는 존중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영화의 시놉시스 자체가 클리셰에 가깝습니다. 반전도 없고(반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전개가 너무 뻔해서 박찬욱 감독이 연출력 하나로 영화를 끌어가려 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예전부터 저는 박찬욱 감독의 색감을 좋아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색감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영화 속 영상미를 뜻합니다.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 는 영상미 하나만으로 버티기에는 다소 부족했습니다. 또한, 다채로운 연기 스펙트럼을 요구하는 작품에 적합하지 않은 배우인 이영애의 연기 역시 보는 내내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문득 김혜수가 떠오르더군요. 김혜수 또한 특정한 이미지가 강해서 폭넓게 활용하기 어려운 배우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두 배우 모두 개인적으로는 아름답고 대단한 배우들이지만요. 이 영화는 올드보이 이후 작품이라 기대가 상당히 컸습니다. 저 역시 그랬고요. 당시 ‘복수 3부작의 완결편’이라고 홍보했었는데, 사실 복수 3부작이라는 개념이 박찬욱 감독 본인의 아이디어였는지, 아니면 제작진이 만든 컨셉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차라리 올드보이 로 복수 2부작을 마무리하는 것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복수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은 복수는 나의 것 이라는 영화입니다. 여담이지만, 세 개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경향은 지금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죠. 그리고 다시 보면서 잊고 있었던 배우들을 발견했습니다. 신하균, 송강호, 유지태, 강혜정, 윤진서까지... 많은 배우가 등장하더군요.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단 한 컷이라도 나오고 싶었던 걸까요? 아마 해외에서도 유명한 올드보이 의 영향이 상당히 컸겠죠. ...

Capharnaum (2018)

가버나움 Director: Nadine Labaki 영화는 참으로 지루했지만, 할 말은 정말 많았습니다. 할 말이 많지만 다 하려니 마치 소설 한 권을 써야 할 만큼의 분량이 나올 것 같고, 그렇다고 할 말을 하지 말자니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았습니다. 다시 또 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최소한 가버나움 이 가지고 있는 배경, 그에 얽혀 있는 지리와 역사, 성경과 예수님 이야기, 그리고 인류학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 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 언급하자니, 주제별로 생각이 너무 장황해서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냥 조금씩 조금씩 빵조각을 뜯어 먹듯이 제 생각을 올려야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신다면 흥미를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상처받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 영화의 제목이 왜 가버나움 인지부터 알아야 했습니다. 왜냐고요? 궁금하잖아요! 가버나움 이라는 지명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빠질 수 없는 도시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궁금했습니다. 성경과 어떤 식으로 연관이 있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정말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향해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성경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습니다. ( 마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 마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 마 1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 마 11:...

인생

인생  위화 장편소설 | 백원담 옮김 소는 밭을 갈아야 하고, 개는 집을 지켜야 하며, 중은 탁발을 해야 하고, 닭은 새벽을 알려야 하며, 여자라면 베를 짜야 하는 법. 그런데 너는 소 주제에 밭을 안 갈겠다는 거야? 이건 예부터 전해온 도리라고. 가자, 가자 사람이란 게, 일단 기생과 놀아났으면 그 다음엔 도박에 손대지 않을 수 없는 법. 여자와 도박은 팔과 어깨처럼 이어져 있어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거든. 나중엔 도박을 더 좋아했고, 기생은 단지 한숨 돌리기 위한 것일 뿐이었어. 하지만 어버지 말씀은 무딘 칼로 목을 베이고도 머리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날 고통스럽게 했다네. 옛말에 당장의 위급함은 도와도 가난은 돕지 않는다고 했네. 나는 자네의 위급한 사정을 도와줄 수 있을 뿐이지, 자네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는 없네. 나는 그 비단옷을 잠시 걸쳤다가 금방 벗어버렸다네. 어찌나 불편하던지. 미끌미끌한게 꼭 콧물로 만든 옷을 입은 것 같더라구. 학교에는 열심히 공부하라고 보내는거지 뜀박질이나 하라고 보내는 게 아냐. 뜀박질도 배울 필요가 있나? 닭대가리도 뛸 줄은 안다구! 여자란 사람들은 한번 화가 나면 못 하는 일도 없고 못 하는 말도 없다네. 여자들은 하나밖에 몰라서 한 번 그렇다고 생각하면 누구도 마음을 돌릴 수 없는 법이야. 위화의 장편소설 인생 의 원제는 ' 산다는 것'  이라고 합니다. 위화의 작품은 허삼관 매혈기 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책입니다. 이 소설은 푸구이라는 노인의 일생을 담은 이야기로, 다 읽고 나니 ' 살아간다는 것' 또는 ' 산다는 것'  이라는 제목이 인생 이라는 제목보다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거기서 거기이지만 말입니다. Life A Novel by Yu Hua | Translated by Baek Won-dam "A cow must plow the fields, a dog must...

ORIGIN

ORIGIN 오리진 댄 브라운 지음 | 안종설 옮김 다빈치 코드 이후 댄 브라운의 소설 팬이 되어 그의 신작을 거의 모두 읽었습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비슷한 이야기 구조에 흥미를 잃게 되어 한동안 그의 작품을 손에서 놓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댄 브라운을 잊고 지내다가, 새로운 소설 오리진 이 출간되었을 때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다시 독서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면서 결국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역시나 댄 브라운 특유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변함없었지만, 내용 자체는 충분히 흥미를 유발할 만했습니다. 요즘 제 심정이 점점 이신론(理神論)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에는 제 지식이 너무 부족했으며, 신의 존재를 확신하기에는 제 신앙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댄 브라운의 신작 오리진 은 이러한 저의 이신론적 관점(혹은 관념이라 해도 좋겠지요)에 있어, 확실한 동반자가 되어 준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ORIGIN Dan Brown | Translated by Ahn Jong-seol After The Da Vinci Code , I became a fan of Dan Brown’s novels and read almost all of his new works. However, as I read more, I gradually lost interest due to the recurring narrative structures, eventually putting his books aside. I had forgotten about Dan Brown for a while, and when his new novel Origin was released, I wasn't particularly excited. However, as my passion for reading reignited recently, I eventually decided to purchase the book. As ex...